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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5일 금요일

"당을 짓는다"가 아닌 "자아중심"으로 번역한 영역판이 3배로 많아(Biblegateway.com)




Biblegateway에서 살펴 본 57개 영어번역판에서 
"파당"으로 번역한 것과 "자아중심"으로 번역한 것과의 격차가
41:14(기타 2)로 "자아중심"이 압도적.
밑줄 친 것은 기타 2. 


KJ21ㅡcontentious
ASVㅡfactious
BRGㅡcontentious
DARBYㅡcontentious
DRAㅡcontentious
GNVㅡcontentious
JUBㅡcontentious
KJVㅡcontentious
AKJVㅡcontentious
MEVㅡcontentious
WYCㅡ of strife
YLTㅡ contentious
RSVCEㅡfactious
RSVㅡfactiouse

AMPㅡselfishly ambitious and self-seeking
AMPCㅡself-seeking and self-willed
CSBㅡself-seeking
CEBㅡselfishness
CJBㅡself-seeking
CEVㅡselfish
DLNTㅡselfish-interest
ERVㅡselfish
EHVㅡselfish ambition
ESVㅡself-seeking
ESVUKㅡself-seeking
EXBㅡselfish [self-seeking]
GWㅡselfish pride
GNTㅡselfish
HCSBㅡself-seeking
ICBㅡselfish
ISVㅡselfish pride
PHILLIPSㅡ the very servants of evil
LEBㅡselfish ambition
TLBㅡwalk in evil ways
MSGㅡgetting their own way
MOUNCEㅡself-seeking
NOGㅡselfish pride
NABREㅡselfishly
NASBㅡselfishly ambitious
NCVㅡselfish
NETㅡselfish ambition
NIRVㅡonly look out for themselves
NIVㅡself-seeking
NKJVㅡself-seeking
NLVㅡ love only themselves
NLTㅡlive for themselves
NRSVㅡself-seeking
NRSVAㅡself-seeking
NRSVACEㅡself-seeking
NRSVCEㅡself-seeking
NTEㅡselfish desire
OJBㅡself-seeking fury.
TPTㅡselfishness and self-promotion
TLVㅡself-seeking
VOICEㅡselfish
WEBㅡself-seeking
WEㅡthink of themselves first before others




인생 항해의 폴라리스
http://trinia5.blogspot.kr/2018/01/blog-post_3.html
DPA pix
http://trinitrinia.blogspot.kr/2018/01/21-photo-letter.html

딱 두 가지ㅡ올바른 성경 해석




육신대로 살면 죽음(영생 불가능)
죄의 본질은 자아중심.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함"의 
핵심은 자기 부인
(그리스도와 하나됨).
다시 말해 가장 이상향적인
삶, 생활, 생명의 법칙.







인생 항해의 폴라리스(Polaris)

http://trinia5.blogspot.kr/2018/01/blog-post_3.html

2018년 1월 4일 목요일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여"









인도하시지 않으면 
다시 말해 우연히는
3운법칙이 발견될 수가 없다. 
유신론을 입증하는 반박 불가능의 증거가 되는
엄청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아니라 성경의 진실성이
거의 전설 취급되었던 노아가 그 3운법칙 연대를 통해
아라랏 산의 방주 형적 진실성 여부 관계 없이
검증됨으로써 드러났고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3운법칙 분석에서
예외가 됨으로써 영존하는 대칭 아담으로서의 성격
(범죄 전 아담은 죽지 않는 영생하는 초자연계 존재)이
유감없이 역시 드러남으로써다.

그러나 비중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성경 해석에 있으니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그릇된 구원관을 바로잡아 주시기 위해 
이런 특단의 조처를 취해 주신 것이라 판단됨.
성경 해석을 정확하게 하지 않음으로 인한 갖가지
폐 청산을 이 마지막 때 하시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님을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님께서 저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셔서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셨다"(행 14:3)고 되어 있다.
오늘날의 "표적과 기사"는 과거와는 다른 현재의 상황이라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실" 수 있었던 
그 때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지금은 이러한 3운법칙, 3위1체의 법칙, DPA pix가
그런 모든 것을 대변하는 시대이다. 

여러 형제 자매님의 
기도해 주심을 간곡히 부탁드려 마지않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시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여"(골 4:3) 함과 같다.

2017년 12월 30일 토요일

3운법칙, 3위1체의 법칙이 유명인을 통해 나타날 수가 없는 이유


인간이 자기 유명세를 악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

성경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께 오직 영광"이라 함은
영광이란 영광은 오로지 하나님 차지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를 기준해서 성경이 설명하는 것이니
즉 우리 자신을 위하지 않는 우리의 처지에서 표현되는 것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림을 의식해야 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고 우리를 위하신다는 뜻.














만물 만상의 진실성 여부 검증의 기본 잣대가 대칭성 원리ㅡ3위1체의 법칙


  
예를 들어 진화론은
인과 관계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2017년 12월 29일 금요일

3위1체의 법칙을 배경으로 하는 첨단 물리학적 발견(재수록)

3위1체의 법칙을 배경으로 하는 첨단 물리학적 발견(재수록)

(이전에 올린 게시물이나 읽기 편하시도록 문단을 더 나누어 다시 올립니다)

아래 김상욱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 

3위1체의 법칙을 그 성격 그대로 앵무새처럼 답
습하여 해설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해 현대 물리학의 최신 흐름은 
3위1체의 법칙(Trinity Principle, trini law, the universal law)
에 집중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아직 3위1체 법칙이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탓에 
그 구체적 특성 즉 대립하는 양자 관계가 
모자(母子) 관계라는 것만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노자(老子)와 장자(莊子) 수준에 그대로 머물고 있다. 
그러나 그 윤곽만큼은 오늘날의 첨단 물리학에 의해 밝혀져 있다는 것,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독자들에게 참고가 될까 하여 옮겨 놓는다.




서로 모순되는 것이 공존하는 세계
양자역학이 밝혀낸 ‘상보성’
우리는 자연의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인가


김상욱/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

서로 대립되는 두 명제 중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빛이나 전자는 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입자성·파동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장자가 말한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 또한 이것’인 셈이다. 
양자역학은 양립할 수 없는 두 개념이 혼재하는 
이중성, 상보성이 자연의 본질이라는 것을 비로소 발견했다.

‘이것’은 또한 ‘저것’이다. ‘저것’ 또한 ‘이것’이다. 
장자(莊子)는 이것과 저것의 대립이 사라져버린 것을 ‘도(道)’라고 했다. 
대립되는 두 개념이 사실 하나의 개념이라는 생각은 
동양인들에게 익숙한 철학이다. 
음양(陰陽)의 조화라든가, 중용(中庸) 같은 것도 
대립하는 개념 사이에서 옳은 쪽을 찾기보다 둘을 조화시키는 동양의 지혜다.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대립되는 두 명제 가운데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이런 이분법은 선악개념에 기초한 기독교에서 친숙하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대립물을 하나로 보는 생각을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20세기 초 현대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이 발견한 것은 
어쩌면 동양의 오래된 지혜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념이 혼재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물리학에서는 이것을 
처음에는 ‘이중성(duality)’, 
나중에는 ‘상보성(complementarity)’이라는 용어로 공식화시켰다. 
상보성의 중요한 예는 하이젠베르크가 찾아낸 ‘불확정성의 원리’다. 
이 원리는 물리학자들이 자연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제약을 가한다. 
이제 물리학자는 우주를 완벽하게 기술하는 전지적(全知的) 위치에서 
주관적이고 확률적이며 불확실한 세상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많은 사람들이 양자역학과 동양철학 사이의 유사성에 흥미를 갖는다. 
서양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는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에서 그 유사성을 자세히 정리했다.
이런 유사성은 그 자체로 흥미롭지만 과학적으로 큰 의미는 없다. 
과학은 실험적 증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은 생각의 틀을 제공하는 법이다. 
독일인 친구 물리학자가 ‘이중성’을 받아들이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어렵기는 했어도 큰 거부감은 없었다. 
아니 동양인으로서 경외감마저 들었다. 

물리학자들은 이런 논리적 모순을 
어떻게 자연법칙의 하나로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서양철학을 근본부터 뒤집은 과학혁명의 순간을 살펴보기로 하자. 
바로 이중성의 발견이다.

■ 이중성 

‘당구공’의 대립물(對立物)은 무엇일까? 
물리학자의 답은 ‘소리’다. 선문답처럼 들린다. 
정확하게 말하면 ‘입자’의 대립물이 ‘파동’이라는 뜻이다. 
당구공과 같은 입자는 무게를 가지고 있지만, 
소리와 같은 파동은 무게가 없다. 
당구공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소리는 어디 있다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다. 
만약 당구공이 파동같이 행동한다면 
여기저기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반대로 소리가 당구공같이 행동한다면 
소리의 개수를 하나 둘 셀 수 있다는 말이다. 
입자와 파동이 대립물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서로 전혀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19세기 물리학의 핵심은 전기(電氣)다. 
1860년대 전기와 자기를 기술하는 맥스웰 방정식이 완성되고,
‘빛’이 맥스웰 방정식의 수학적 해(解)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빛은 전기장과 자기장의 파동, 즉 전자기파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전자기파를 이용한 무선통신의 탄생과 함께 20세기가 시작된다. 
바로 이 순간 물리학자들은 모순에 부딪힌다. 
빛이 파동이라는 사실이 확립된 바로 그 때 
빛이 입자라는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 증거는 ‘흑체복사’라는 현상이다. 
복사(輻射)란 빛을 내는 것이다. 
온도를 가진 모든 물체는 빛을 낸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깜깜한 방에서는 안 보이는 걸까? 
사람은 체온에 해당하는 흑체복사, 즉 적외선에 해당하는 빛을 낸다. 
인간의 눈은 적외선을 볼 수 없다. 
적외선도 전자기파의 일종이다. 
적외선을 감지하는 야시경을 쓰면 깜깜한 방에서도 사람이 보인다. 
태양도 빛을 낸다. 섭씨 6000도라는 표면의 온도는 
태양의 빛을 흑체복사이론으로 분석해 알아낸 것이다.

흑체복사이론은 
막스 플랑크(191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제안한 것이다. 
이 이론에는 기묘한 가정이 하나 필요했다. 
빛의 에너지가 특정한 값의 정수배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돈이라면 빛의 에너지는 반드시 100원, 200원, 300원 등만 가능하다. 
120원이나 145원은 안된다. 
이런 기묘한 상황을 설명하는 손쉬운 방법은 
빛이 100원짜리 동전으로 돼 있다고 하는 거다. 
빛이 입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빛은 파동이다! 
플랑크는 보수적인 사람이라 차마 빛이 입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빛이 입자라고 처음으로 용감하게 외친 사람은 
당시 특허청 말단 직원이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921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이었다. 

빛이 입자라는 두 번째 증거는 ‘광전효과’다. 
금속에 빛을 쬐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이다. 
이 실험은 금속에 전자를 충돌시켜 빛이 나오는 실험을 거꾸로 한 것이다. 
당시 금속에 전자를 충돌시켜 발생한 엑스(X)선이 화제였다. 
엑스선을 사람에게 쬐면 몸속의 뼈가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엑스선도 전자기파의 일종으로 밝혀진다. 
빌헬름 뢴트겐은 엑스선 발견의 공로로 
1901년 제1회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아무튼 엑스선 발생과정을 거꾸로 하면 이번엔 전자가 튀어나온다. 
여기까지는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쬐어준 빛과 튀어나온 전자의 에너지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흑체복사 때와 같이 빛의 에너지가 띄엄띄엄하다는 가정을 해야 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빛이 입자라고 용감하게 주장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물리학자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빛은 파동이니까. 
결국 빛이 입자라는 세 번째 증거가 나오자 
비로소 물리학자들은 빛의 입자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1920년대 초 아서 콤프턴(192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이 
빛으로 당구공 실험을 해 빛이 입자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당구공을 서로 충돌시키면 어떻게 행동할지 
뉴턴역학으로 완전히 기술할 수 있다. 
콤프턴은 빛이 당구공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을 보인 것이다. 

이제 물리학자들은 서양과학사의 최대 모순에 빠지게 된다. 
파동임에 틀림없는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갖는다. 
여기서 ‘이중성’이라는 용어가 탄생한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물리학에 이중성이라는 개념이 탄생하던 1920년대, 
예술에서는 ‘초현실주의’ 운동이 시작됐다. 
인간의 무의식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으로,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표절(Le Plagiat)’을 보면 
집 안에 있는 나무 내부에 집 밖 풍경이 그려져 있다.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의 공존은 
이 시대의 새로운 사고방식일지도 모르겠다. 

■ 상보성 

파동인 줄 알았던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갖는다. 
그렇다면 입자인 줄 알았던 ‘것’이 파동의 성질을 가질 수는 없을까? 
당시 물리학자들은 원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원자는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로 구성된다. 
닐스 보어(192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수소 원자를 설명하는 이론을 내놓았지만 
모든 물리학자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말도 안되는 가정을 포함하고 있어서다. 
보어의 이론은 맥스웰 방정식을 무시하는 듯했고, 
심지어 전자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위기에서 물리학을 구한 것은 
루이 드 브로이(192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였다. 
드 브로이는 전자가 파동같이 행동한다고 주장했다.

전자는 입자다. 무게를 갖는다. 
그래서 전자빔을 쬐면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세상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 
당신 몸도 원자로 되어 있다. 원자는 전자와 원자핵으로 구성된다. 
전자가 파동이라면, 당신 몸이 소리로 되어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전자의 파동성은 큰 저항 없이 물리학계에 받아들여진다. 
이미 빛의 이중성이라는 더러운(?) 꼴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빛과 전자는 왜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갖는 것일까? 
이 두 성질은 물리적으로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무선 통신을 할 때 빛은 파동으로 행동하지만, 
광전효과실험에서 빛은 입자로 행동한다. 
이 두 실험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둘 중에 하나의 실험을 하면 빛은 입자와 파동,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 
마치 남자냐고 물으면 남자가 되고 
여자냐고 물으면 여자가 되는 귀신과 같다. 전자도 마찬가지다. 
사실 양성자, 중성자 등 물질을 이루는 모든 기본입자뿐 아니라, 
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원자도 전자와 같은 이중성을 갖는다. 
이중성은 자연의 본질인 것 같다. 
여기서는 질문이 존재를 결정한다. 
보어는 이중성의 이런 특성을 ‘상보성’이라 불렀다. 

힌두교의 경전 우파니샤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것은 움직인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멀다. 그리고 그것은 가깝다. 
그것은 이 모든 것 속에 있으며 이 모든 것 밖에 있다.’ 
상보성은 모든 대립물이 동시에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상보성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잘 정의된 물리적 성질들이다. 
상보성은 불교 시인 아슈바고샤가 이야기한 
“그러한 것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요,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와 같이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실험을 하면 대립물 가운데 하나로 답이 정해진다. 
상보성은 정반합(正反合)의 철학과도 다르다. 
상보성은 정(正)과 반(反)이 공존한다고 말할 뿐이다. 
둘이 융합해 새로운 합(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실험을 하면 대립물 가운데 하나만 옳다. 

상보성 개념을 제안한 보어는 1937년 중국을 방문한다. 
그는 태극문양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양자역학을 이해할 사고의 틀이 서양에는 없었지만, 
양에는 있었던 것이다. 
1947년 보어는 물리학에 대한 그의 공로로 덴마크 귀족 작위를 받게 된다.

‘상보성’ 개념을 제안한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을 이해할 사고의 틀로 자신의 귀족 예복에 태극문양을 새긴 뒤에 
‘CONTRARIA SUNT COMPLEMENTA
(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인 것이다)’라는 라틴어 문구를 넣었다. 

■ 불확정성 

상보성의 대립물 가운데 물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위치와 운동량이다. 
운동량이란 물체의 질량에 속도를 곱한 양이다. 
그냥 속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신 앞에 있는 스마트폰을 보자. 
스마트폰이 보인다면 위치는 당연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속도는 어떨까? 
당신 손 위에 정지하고 있으니 속도도 아는 거다. 
하지만 위치와 속도, 둘을 동시에 정확히 안다면 상보성에 위배된다. 
이게 말이 되나? 상보성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전자나 원자와 같은 기본입자들이다. 이들은 엄청나게 작다. 
당신 손톱 위에 1억개의 원자를 일렬로 늘어세울 수 있을 정도다. 
상보성에 따르면 이렇게 작은 원자의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3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발견한
‘불확정성 원리’다. 

위치와 속도를 모두 정확히 알 수 없다면 
물체의 운동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산에서 출발한 자동차가 시속 100㎞로 1시간 달리면 
어디에 있을지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자동차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속력이 얼마인지 모른다면 
1시간 후의 위치를 알 방법은 없다. 
불확정성 원리가 옳다면 
우리는 원자에 대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한마디로 모른다는 거다. 
불확정성 원리가 말하는 무지(無知)는 
우리의 실험장비나 감각기관의 부정확성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상보성, 그러니까 자연의 근본 원리로서의 무지, 본질적인 무지다.

뉴턴의 물리학은 물체의 운동을 완벽하게 기술한다. 
우리는 언제 일식이 일어날지, 언제 화성이 지구에 가장 근접할지 알 수 있다. 
17세기 이래로 물리학이 승승장구한 이유다. 
하지만 원자에 대해서는 결론이 ‘모른다’는 것이라니…. 
양자역학이 발견한 물리(物理), 즉 사물의 이치는 
결국 불가지론(不可知論)이란 말일까. 아니다. 
양자역학은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과학 이론 가운데 가장 정밀한 결과를 준다. 
더구나 20세기의 첨단 과학은 대부분 양자역학의 자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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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영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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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항해(航海)의 북극성(polaris)


3운법칙(인간 생애-生涯의 법칙)과 3위1체 원리(20세기 발견의 만유의 법칙/창조 및 존속의 법칙/삶과 구원의 법칙)는 상호 검증






생명에서 시작하면 죽음, 죽음에서 시작해야 생명(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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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8일 월요일

움켜 쥔 손을 활짝 펴고 집었던 것을 탁 놓아라ㅡ그래야 산다





나를 잡으려는 사람 인기척이 납니다. 
항아리 속에 손을 집어 넣어 움켜 쥔 것 탁 놓으세요.
그리고 앞뒤도 돌아볼 것 없이 튀세요.
항아리 속에 든 것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목숨보다는 덜 귀한 것이잖아요. 

'사람'은 짝의 원리이고 '원숭이'는 나입니다.
'항아리'는 세상이고 '항아리 속의 것'은 이 세상 살고자 하는 마음.
'목숨'은 죽지 않는 생명입니다. 
원숭이를 잡을 때 원숭이 좋아하는 것 잔뜩 넣어놓고
가만이 기다리면 된답니다. 
단 항아리 아가리는, 원숭이 주먹은 들어가지 않고
손을 펴서 오그릴 때에만 겨우 들어가는 크기 정도.

그러면 녀석은 사람 오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움켜쥔 것을 탁 놓을 수 없어 머뭇거리다가 생포된다는 것.
아주 딱 들어맞는 예화입니다. 
원숭이 낯짝만 아니라 너무나 우리가 녀석을 닮았습니다. 

짝의 원리에서 서로 대칭되는 것을 이제 아셨지요.
대칭에서 양쪽의 성질은 180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아는 겁니다. 
그것 모르면 대칭성 원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원리에서는 꿩 먹고 알 먹는 일은 없습니다.
꿩 아니면 알, 양자 선택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도 하고 
이 세상 삶을 즐기기도 하는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후자를 택하면 전자를 버려야 하고 
전자를 원하면 후자를 반드시,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 
이제는 짝의 원리가 3위1체의 법칙으로 확실히 정착됨을 알았으니
세상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마세요. 
짝을 이룬 소미립자가 하나가 UP spin(엎스핀)이면
반드시 그 다른 하나는 보나 안보나 DOWN spin(다운스핀)입니다.
반대로, 전자가 DOWN이면 후자는 반드시 UP입니다. 

짝으로서의 둘의 공존은 
성질이 서로 반대되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양쪽이 반대됨으로써 하나 곧 짝을 이룬다
이것이 3위1체의 법칙입니다. 
양자 역학은 이 3위1체의 법칙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지금은 한시적이니 반드시 영원한 세상이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삶을 만끽하거나 최소한 그것을 추구만 해도
오는 영원 세상에서 그 정반대의 것을 영원히 타고 나게 됩니다.
절대로 면할 수가 없고 피할 수가 없습니다. 
고스란히 그대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만 해도 3위1체의 법칙은
당신의 생/生에 충분한 경고를 해 준 셈입니다. 
첫 창조에서 인간(아담)이 잘못해 죽음 즉 자연계 존재가 되어 버림을
만회, 회복하는 것도 짝의 원리에서 이 단 한 번만의 기회입니다.
처음 아담과 대칭 아담과의 대칭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 번 다시 기회는 오지 않습니다. 

때문에 지금 웃는 자는 울게 되고 
지금 우는 자는 웃게 된다고 하셨으니
바로 이 3위1체의 법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입을 벌려 웃는 것을 지적하심이 아니라
행복한 웃음이 연속되는 네 활개치며 사는 
세상 삶의 재미를 가리키심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는 것의 집착만 끊어도
사탄의 시험의 1/3은 이기는 것이 됩니다. 
나머지 2/3는 나는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는
생명(사랑)의 법칙을 준수함에 있으니 
곧 대칭 아담께서 말씀하신 바 "새 계명" 지키는 일입니다.
쉽게 말해 3위1체의 법칙 따라 운영되는 "새 생명"입니다.
주님의 광야 시험의 성격이 그러합니다(마 4:1-11).

이런 조건하에서는 사탄의 시험은 더 이상 맥을 못춥니다.
시험이 오는 족족 모조리 격파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부인을 강조하시고
매일 십자가 짐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내가 구원해야 할 죄인의 그 십자가 지지 않고는
다시 말해 주님의 죽으심을 짊어지지 않고는(고후 4:10,11)
주님의 생명이 그 죄인에게 적용될 수가 없고
따라서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이치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항상 내 육체에 채우는 자가
이 세상 삶의 재미를 누릴 수가 없음이니
그래서 일락을 좋아하는(to live in pleasure) 자는
"살았으나 죽었다"(딤전 5:6)는 선고가 내려지게 마련입니다.